외국 언론이 바라본 김정남 사망, 김정은은 이복형을 살해하지 않았다

2017. 2. 19. 22:49개똥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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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매든 존스 홉킨스 대학 한미 연구소 객원 연구원



김정남씨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의 장남으로 현재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 조선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이었다.

그는 1971년 5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북한의 영화 배우 성혜림이었다. 

성혜림의 부모는 한국 전쟁 중에 한국에서 북한으로 이주한 공산주의 지식인이었다.

성혜림은 김정일보다 4 ~ 5 살 연상으로 사귀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결혼하고 아이도 있었다.

보수적인 북한사회에 두 사람의 관계는 상당한 파문을 불러일으켰으며, 김정일은 수년동안 내연의 처와 두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에게 숨기고 있었다.

김정남이 태어난 당시 김정일이 제일 후계자로 추대되는 상황이었다. 

그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숨겨져 있던 김정남은 평양 중심부의 저택에 격리되어 성장했다.

다양한 심신의 질병을 안고있는 어머니는 자주 북한 밖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었다. 

따라서 김정남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숙모 성혜랑과 함께 살았다. 


10 년의 여정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조카에 해당하는 어린 김정남을 끌고 자신의 아들로 키우려고 한 적이있었지만,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정일은 아들에게 다정했다. 

함께 자고 식사를 함께하고 너무 바빠서 귀가 할 수 없는 경우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한국측에 퍼진 소문과는 달리, 정남은 할아버지 김일성과 면담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로서의 관계를 구축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정은과 노동당 간부

김정남은 1979년 부터 10년간 북한 밖에서 생활을 시작하고 해외에서 학교를 다녔다.

러시아와 스위스에 머물며 불어와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후, 1980년대 후반에 귀국했다.

외부 세계를 경험한 김정남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평양과 원산에서의 생활에 좌절하게 되고, 결국은 북한의 정치, 경제체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런 아들의 언동에 위협을 느낀 김정일은 어린 김정남을 강제 수용소에 정치범으로 보내는 등 그의 사상을 돌리기 위해 반복적으로 위협을 가했었다.


"날라리"

수용소로부터 나오기는 했지만, 김정남은 아버지의 지속적인 위협과 비현실적인 기대를 받으면서 20대를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결코 없었지만, 그래도 가업에 참여하여 북한의 공안 활동이나 해외에서 외화 획득 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대기근 '고난의 행군'에서 수십만명이 사망한 가운데 국영공장의 운영상황을 조사하기위한 감사에 정남도 참석했다.


1983년 평양의 당원집회에 참석한 김일성과 김정일

공장감사 결과 '국고를 무단으로 사용한' 공장경영자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되는 모습을 정남은 지켜보게 된다.

다양한 요인이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정남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끄는 국가의 정치체제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는 1990년대 후반에 결혼을 하였고 몇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2000년대 초반 이후 마카오와 베이징에 있는 저택에 머물게 된다.

수십억 달러에 육박하는 김씨일가의 비자금계좌의 관리가 정남의 역할이었다. 

그는 또한 북한의 불법 사업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마약과 무기밀매 등의 사업에 김정남이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정규 또는 비정규적이든 사업 수익이 정부당국의 수사망에 포착되지 않도록 하는것이 그의 주요 업무었을것으로 보여진다.


아시아 각지의 카지노의 단골이 되어 김씨일가의 비자금관리자로써 자유롭게 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화려한 날라리로 알려지게 된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족의 갈등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김정일은 오사카 출생의 재일 조선인에 만수대 예술단의 일원이던 고영희와 사귀게 되었다.

마사오가 외국에있는 동안 김정일은 고영희와 살게되고,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중간의 차남이 현재의 국가 지도자 김정은이다.

다른 아내와 내연의 처와 달리 그녀는 정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남편의 측근이나 장군들에게 접근하고 친해지려 노력했다.

1980년대 후반에 김정남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이미 높은 아이들을 후계자로하려고 획책하고, 하인 사이에서 소문이 난무했다. 

북한에서는 지도자의 세습을 화제로 삼는것은 금기시 되어 있기에, 함부로 입을 놀리면 공개처형을 당하게 된다.


이를 통해 두 아들 정철, 정은 형제 중 하나가 후계자가 되도록 기초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2001년 5월 위조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고 정남이 도쿄에서 체포된 것은 처음에는 김씨일가와 북한 수내부의 면모를 실추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국가의 간부가 위조여권으로 이동하고 있는것이 노출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때문에 김정남이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는 이미 후계자로써 고려대상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김정은은 이복형을 과연 죽였을까?

김정은은 현재까지 간부들을 차례로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벌이고 있다

김정은의 통치력 (또는 정신건강)은 '불안정'하다는 분석이 잇따르는 가운데, 이복형을 죽여도 김정은의 이미지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얻는 이익도 거의 없다.


김정남은 김정은에게 있어서 위협요소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김정남이 지도자가 되려는 야망과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긴 외국생활때문에 김정남은 북한 수뇌부 사이에 권력 기반을 구축할 기회도 없었고, 통치기구의 어디를 어떻게 장악하면 실권을 잡을것인지도 거의 알지 못했다.

김정남은 중국 지도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어느정도는 중국당국의 보호하에 있었다.

수개월 전부터 북한은 최대의 동맹 상대 무역 파트너인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김정남이 중국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도가 떨어졌으면 몰라도, 아시아지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김정은이 이복형 살해를 명령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손자 같은 존재

김정남은 평양에 실태를 수반하는 권력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공개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북한의 지배에 관심이있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정남 씨의 사망을 전하는 한국 TV

북한 수뇌부의 장로들, 특히 김일성에 가까웠던 사람들은 김정남을 손자 같은 존재로보고 있었다.

김일성의 전 측근들은 김정남의 이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남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는 고위장로들이 적지 않았다.

이 친근감과 관계가 반드시 김정남의 국내 정치에 있어서 기반이 될수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만약 김정남이 향후 이복동생을 정적으로 하여 세력을 키운다면 매우 유용한 자산이 될 것이다.

2011년에 김정은이 권력을 쥐고, 북한의 국영 미디어는 이러한 혁명의 장로들이 김정은을 찬양하는 모습을 일부러 전해왔다.

그리고 공식 행사되면, 김정은은 항상 일부러 장로들을 환영하고 그 모습을 촬영하곤 했다.

장로들과 국가의 영웅을 존중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 파격적인 대우였다.

선전의 일환으로 북한 건국세대의 지지를 필요로 하고 있는쪽은 김정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 지도자를 국가의 지도자들이 일치 단결하여 지원하고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만약 김정남이 권력장악을 목표로 "자신이야말로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고 정은에 도전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자신을 지지해준 삼촌 장성택과 고모 김경희가 더 이상 중심세력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은점은 큰 마이너스 요인이다.

김정남은 30년 가까이 한국언론의 표적이 되었고 한국언론은 김정남에 대한 정보왜곡을 계속 해왔다.

공적인 행동 또는 사적인 행동에 대해 김정남은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소문에 대하여 대부분 반박했다.


김정남의 죽음에 대해, 이미 신뢰성 있는 다른정보가 흘러나오고 있다. 

어쩌면 단순히 심장 마비에 의한 사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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